내가 중학교 3학년생 시절의 1990년대 초. 해질녘이면 동네마다 꾸려진 작은 공터 여기저기서 어김없이 요란한 소리가 났다. ‘퉁탕, 퉁탕, 퉁탕, 타다닥, 쿵.’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그림자가 점점 길어지기 시작하면 예외없이 우리는 농구공을 들고 간이 농구대가 있는 곳으로 모였다. 희미한 기억속에는 일요일 아침마다 어느 채널인지 마이클 조던과 찰스 바클리의 NBA를 방영하고 있었고 우리 모두는 자신들만의 우상을 선별해내 그들의 무브를 흉내내던 시절이었지만 누구도 감히 덩크슛을 시도해볼 키는 아니었기에 우리는 덩크슛의 느낌이 대체 어떤 건지 궁금해 의자나 친구의 몸을 발판 삼아 가까스로 점프를 하고 골대를 움켜잡은 채 한참을 매달려 보기도 했었다. 빨간색 고무공 하나만으로 참 열심히도 뛰었다. 흙바닥의 농구코트 비스무레한 공터 위 중고등학생들 그 중 누군가는 서태웅이었고 3점의 정대만이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송태섭이었었다. 형들을 따라나온 어리지만 패기넘쳐 보이는 친구는 강백호고, 그 중 연배있는 형들 중 우직하고 농구를 잘 알고 곧잘 하는 누군가는 채치수가 됐다.
아직도 취미이자 유일한 운동으로 농구를 한다. 수원에서 오랜시간 농구를 즐기다 결혼을 하게 되었고 수원에서 신혼집을 알아보다 가진 돈에 맞춰 남양주 화도읍이라는 생면부지 동네에서 집을 구해 아이 둘을 키운지도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는 동생이 최근 개봉한 슬램덩크 극장판을 보고 와 흥분하여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옛 향수에 젖어들어 노트북을 열었다. 어느덧 중년의 터널에 진입했지만 분명 난 슬램덩크 세대다.
10년전까지만 해도 공 좀 튕겼다고 어디가면 어깨에 힘이 먼저 들어가곤 했었는데...
정기적으로 함께 운동하는 후배들과 간혹 게스트로 간 체육관 옆자리에 앉은 이름 모를 누군가와 아직도 슬램덩크 속 캐릭터를 빗대어 누군가를 비교하는 멘트를 나눌때 같은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는 묘한 동질감의 ‘집단 감동’의 순간이 나와 그를 함께 묶어낸다.
그리고 보면 슬램덩크는 30년정도 지난 만화다. 하지만 함께 운동하는 후배들의 소셜미디어 대문사진엔 오리지널 슬램덩크 사진이 간증하듯 올라와 있는것을 볼때가 있다. 31권의 단행본들로 기억하는데 그것을 수십 번째 완독했다며 자랑처럼 이야기하는 선후배들, 동호회 정기모임 후 간단한 술자리에서 만화 속 캐릭터를 섬세하게 재해석하는 이들이 아직 제법 많다. ‘그깟 만화 보느라 허송세월한다’는 핀잔과 잔소리를 이겨냈던 우리는 세상 어딘가에서 각자 성실하게 자신들만의 드리블을 하며 부모라는 가볍지 않은 짐을 지게 되었고, 누군가의 직원이, 누군가의 리더가 되어 있다.
슬램덩크는 언더독들이 모인 북산고 농구부의 이야기다. 언더독은 이길 확률이 거의 없는 팀을 의미하는 영문 표현이다. 거의 모든 스포츠를 다루는 콘텐츠의 서사가 보통은 역경을 딛고 끝끝내 승리하는 영웅담으로 장식되지만, 어른이 돼 다시 느끼는 슬램덩크는 그 결이 다른 것 같다. 우리의 삶도 결국 끝끝내 승리할 수 있을까?
10대 때 봤던 슬램덩크는 채소현이라는 현실적이지 않을 만큼 농구를 사랑하고 예쁘고 순수하기까지한 여자아이와 북산의 승패였다. 도무지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경기에서 북산이 이기느냐 지느냐가 궁금했고, 책장을 재빨리 넘기기에 급급했다. 40대에 슬램덩크는 우리 각자 삶에 관한 철학적 이야기로 다가온다. 북산고 농구부엔 결점과 트라우마를 가진 선수들로 가득했다. 듬직한 ‘고릴라 주장’ 채치수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스스로를 의심하고 스스로 ‘농구 천재’라고 말하던 괴짜 강백호는 경기에 나설수록 자신감이 점점 무너지고, 팀의 에이스 서태웅은 외로운 나르시시스트로 그려진다. 무릎 부상으로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방황했던 기억이 트라우마가 된 정대만, 160㎝대 작은 키로 포인트 가드 역할을 해야 하는 노력파 송태섭까지.
이들은 각자가 내면의 결핍으로 각자의 아픔과 상실을 겪는다. 그리고 이들을 강하게 만드는 건 또 다른 결핍을 지닌 동료의 말 한마디와 이들에 대한 굳은 믿음이었다. 위기의 순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믿는 동료들에게 의지하면서 언더독 북산고는 어느 순간 강자로 거듭난다.
최근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즘 내가 찾아 읽는 책들의 대부분이 자기계발서와 심리학 관련 서적들이다. 그래서인지 슬램덩크 속 그들은 현재 우리들이었고 슬램덩크는 만화책이 아닌 그때 우리들에겐 유수의 성공한 위인들이 써낸 책들보다 더 대단한 자기계발서였다. 우리가 사는 현재, 돈 때문에 목숨 걸고 싸우고, 이유 없이 남을 괴롭히고,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자극적인 영상들 사이에서 어쩌면 가장 순수한 열정만의 시절을 가장 박진감 넘치게 만화로 그렸던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영광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온다고. 그 순간이 지금일 수 있다고"
슬램덩크 속 이야기만으로만 믿고 싶진 않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올수 있도록 열심히 드리블 하고 슛 쏘는 연습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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